지난해 가을 외국 오디오잡지를 보다가 묘한 표현에 눈길이 갔다. ‘회사 설립자들의 오디오 경력을 합하면 200년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그 수치가 놀랍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각자 경력을 왜 합산하는지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이 회사가 불과 지난해에 본격 출범한 ‘신생’ 스피커 제작사이고, 설립자들 모두가 그 유명한 탄노이(Tannoy)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니 ‘200년’ 마케팅도 나름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인공은 영국 스코틀랜드에 본사를 둔 파인오디오(Fyne Audio). 사명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지역에 있는 유명 호수 이름 ‘로크 파인’(Loch Fyne)에서 따왔다. 지난해 겨울, 마침 내한한 파인오디오 세일즈&마케팅 디렉터 맥스 모드(Max Maud)씨를 만나 인터뷰를 할 수 있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회사 설립자들의 오디오 경력이 진짜 200년이냐?’고 물었다.
▲ 파인오디오의 세일즈 & 마케팅 디렉터 맥스 모드 (Max Muad)
“네, 맞습니다. 저를 포함해 5명의 주요 창립멤버들의 오디오업계 경력을 따지면 200년이 넘습니다. 그것도 모두 탄노이에서 일하던 사람들이죠. 저만 해도 미션과 와피데일, 탄노이 등에서 25년 일했습니다. 탄노이가 피인수되고 나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탄노이의 철학을 이어갈 수 있는 회사를 만들자’는 생각에 탄노이 엔지니어링을 책임져 온 폴 밀스(Paul Mills) 연구소장 등 5명이 함께 파인오디오를 설립했습니다. 저희 5명 외에도 스코틀랜드 주정부와 중국 상하이의 한 기업도 지분 참여를 했습니다.”
파인오디오와 탄노이 동축유닛
▲ 파인오디오의 기술로 제작된 동축 유닛, 아이소 플레어 (IsoFlare)
탄노이 출신들이 설립한 스피커 제작사인 만큼 동축유닛이야말로 파인오디오의 가장 강렬한 키워드다. 실제로 플래그십인 F1-10과 차상위 F700, F702, F703, 중견 F500, F501, F502에는 파인오디오의 동축유닛 ‘아이소플레어’(IsoFlare)가 투입됐다. ‘동축’이라는 말 그대로 멀티 파이버(multi-fibre) 콘 미드우퍼와 75mm 티타늄 돔 컴프레션 트위터가 같은 축으로 결합됐다. 하지만 탄노이의 듀얼 콘센트릭과는 달리, 고역 컴프레션 드라이버 개구부에 주름 구조를 집어넣어 지향특성을 크게 개선시킨 점이 특징이다.
▲ 파인 오디오의 베이스 트랙스 트랙트릭스 프로파일 디퓨저
파인오디오 상위 모델들의 독특한 베이스 리플렉스 설계도 주목할 만하다. 플린스에 ‘베이스트랙스 트랙트릭스’(BassTrax Tractrix)라는 일종의 원추형 디퓨저를 설치, 스피커 밑바닥의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로부터 빠져나온 저역 후면파를 360도로 방사시킨다. 정면파를 교란시키는 후면파를 매끄럽게 분산시키는 동시에 스피커 세팅도 훨씬 유연하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베이스트랙스 트랙트릭스 기술은 F1-10, F700 시리즈, F500 시리즈에 적용됐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간 파인오디오의 또다른 특징은 미드우퍼 서라운드(엣지)에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진 홈. ‘파인플루트’(FyneFlute)라고 명명한 이 홈들 덕분에 서라운드 고유의 공진과 착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파인플루트 홈은 F700, F500 시리즈, 그리고 이번 시청기인 F300 시리즈 미드우퍼에 모두 적용됐다. 플래그십 F1-10에는 이 기술을 더 고차원적으로 적용시킨 ‘트윈 롤 패브릭 서라운드’(Twin Roll Fabric Surround)가 베풀어졌다.
F300, 파인오디오의 엔트리 시리즈
▲ (좌측부터) F301, F302, F303
시청기는 파인오디오의 엔트리 F300 시리즈의 F301(북쉘프)과 F302, F303(이상 플로어스탠딩)이다. F300 시리즈에는 이들 말고도 또다른 북쉘프 스피커인 F300을 비롯해 센터 F300C, 벽걸이 F300LCR 등 총 6개 모델이 포진해 있다. F300과 F301은 미드우퍼 크기(각각 5인치, 6인치)에서 차이를 보인다. F303은 미드우퍼-트위터-미드우퍼로 이어지는 소위 ‘MTM’ 유닛배치를 활용했다.
F300 시리즈는 무엇보다 상위 모델들과 달리 전통적인 2웨이 스피커 제작 방식을 택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즉, 아이소플레어 동축유닛 대신 트위터, 미드우퍼 구성의 2웨이 유닛 배치와 캐비닛 후면에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를 투입한 것이다. 하지만 파인오디오의 3대 기술 중 하나인 파인플루트 홈은 F300 시리즈에도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결국 이 같은 취사선택을 통해 각각 40만원, 70만원, 100만원이라는 놀라운 가격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클로저는 MDF이며 내부에 브레이싱 처리가 됐다. 또한 캐비닛 강성을 높이기 위해 미드우퍼 마그넷과 브레이싱 사이에 공진 흡수(resonant-absorbing) 역할을 하는 매스틱(mastic. 고무질 수지)을 투입한 점이 눈길을 끈다. 크로스오버 네트워크에는 저손실 적층 코어 코일, 폴리프로필렌 커패시터 등 고품질 부품을 선별해 썼다. 마감은 월넛, 블랙 애쉬, 라이트 오크 중에서 고를 수 있다.
F301, F302, F303 비교
각 모델별로 하나하나 따져보자. 세 모델 모두 트위터는 25mm(1인치) 폴리에스터 돔 진동판을 썼다. 미드우퍼 진동판은 150mm(6인치) 멀티파이버 콘으로 중앙에 중역대 롤오프를 부드럽게 해주는 페이즈 플러그가 달렸다. F303은 MTM 유닛배치(D’Apolito driver configuration)를 취한 만큼 미드우퍼가 2개 투입됐다. 이 다폴리토 유닛배치는 크로스오버 주파수 부근에서 음확산을 부드럽게 하고 스위트 스팟 범위도 넓게 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계디자인만큼이나 스펙에서도 세 모델은 엄격한 위계질서를 보인다. 우선 -6dB 기준 주파수응답특성을 보면, 스탠드마운트 타입 F301이 44Hz~28kHz, 플로어스탠딩 F302가 36Hz~28kHz, 다폴리토 F303이 32Hz~28kHz를 보인다.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모두 3.2kHz로, 미드우퍼의 커버범위가 무척 넓은 점이 눈길을 끈다. 핵심 중역대를 크로스오버로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슬로프는 로우패스(미드우퍼쪽)가 2차 오더(-12dB), 하이패스(트위터쪽)가 3차 오더(-18dB)를 보인다. 미드우퍼의 하이패스 슬로프가 트위터의 로우패스 슬로프보다 더 가파른 점이 눈길을 끈다.
감도는 세 모델 모두 8옴이며, 감도는 F301이 89dB, F302가 90dB, F303이 91dB를 보인다. 따라서 소출력 앰프로도 F300 시리즈를 수월하게 구동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파인오디오에서 밝힌 권장 앰프 출력은 F301이 25~100W, F302가 30~120W, F303이 35~150W다. 스피커 케이블 연결을 위한 금도금 바인딩 포스트는 F301과 F302가 싱글 와이어링, F303이 바이어와이어링을 지원한다.
셋업 및 시청
시청에는 오렌더의 DAC 내장 네트워크 뮤직서버 A100, 유니슨리서치의 인티앰프 Unico Due를 동원했다. Unico Due는 프리앰프단에 진공관(ECC83), 출력단에 트랜지스터(MOSFET)를 투입한 하이브리드 타입의 인티앰프로, 8옴에서 100W를 낸다. 또한 ESS Sabre ES9018K2M DAC 칩과 MM 포노앰프 모듈을 장착, 디지털 음원 및 LP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시청시에는 A100에서 아날로그 신호를 뽑아냈다.
▲ Andris Nelsons, Boston Symphony Orchestra ‘Shostakovich Symphony No.5
먼저 F301로 들었다. 팀파니가 보무도 당당하게 등장한다. 한 음 한 음이 분명하다. 물론 스케일은 작게 펼쳐지지만 눈에 띌 정도로 대역의 아랫도리가 휑하니 잘린 느낌은 없다. 오히려 덩치와 스펙 이상으로 음들이 풍성하게 잘 나온다. 밀도감 역시 부족하지만 음들이 매끄럽게 잘 튀어나오고 음결이 무척 깨끗한 점도 마음에 든다.
대편성곡을 이 정도로 소화하는 것을 보면 기본이 착실하게 다져진 북쉘프 스피커임이 분명하다. 이어 F302로 들어보면, 비로소 보무가 청년의 것으로 업그레이드됐다. 트위터의 존재감도 F301 때보다 줄어들어 좀더 편하게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다. 음수가 많아진 점, 다이내믹 레인지와 다이내믹스가 증가한 점도 인상적. 팀파니에도 좀더 파워가 실렸다.
그러면 F303은 어떤 소리를 들려줬을까. 첫 음이 나오자마자 이렇게 메모했다. ‘네, 1등입니다’. 정말 좋았다. 음들이 더욱 선명하고 파워풀해진 것이 확연하다. 재생음에 마침내 혈색이 돈다고나 할까. 이미지가 세 모델 중 가장 또렷하게 맺히는 점도 쉽게 포착된다. 넓어진 무대 스케일, 섬세해진 피아니시모 표현력도 좋았다. F303이라면 대편성곡을 마음껏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 Charlie Haden, Pat Metheny ‘Cinema Paradiso (Beyond The Missouri Sky)’
F301으로 들어보면, 기타와 손끝 마찰음이 생생하게 들리고 배경은 고요할 정도로 적막하다. 처음부터 스피커가 사라진다. 기타의 할로우 바디를 돌아나오는 공명음까지 잘 느껴진다. 역시 악기수가 많지만 않다면 소형 스탠드마운트 스피커가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분명히 존재한다. F302로 바꿔보면, 역시 기타 연주 손가락에 힘이 더 들어간 모습이 확연하다.
이 증가한 에너지감이 F301과 F302의 가장 큰 차이다. 거친 맛 역시 거의 없어졌다. F303으로 들어보면, 무엇보다 배음이 곱절 이상으로 늘어난 점이 눈길을 끈다. 덕분에 음이 필자의 몸에 닿는 촉감이 배가 부를 정도로 풍부하고 풍윤하며 풍성하다. 또한 손가락과 현의 마찰음이 더욱 잘 들리는 것을 보면 전체적인 노이즈 관리도 F302보다 더 잘 된 것 같다. SNR이 상급 모델로 올라갈수록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Carlo Maria Giulini, Wiener Symphoniker ‘Concerto For Piano and Orchestra No.5’
소형 F301로 듣는데도 마치 현장에 온 것 같다. 콘서트홀 좌석에 앉아 관객들의 헛기침소리까지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공간감에 대한 정보를 잘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물흐르듯 윤기있고 고급스러운 피아노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오케스트라 반주는 약간 흐릿한 느낌이다. 또한 인티앰프인 탓도 있겠지만 무대의 안길이가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부족한 점이 안타깝다.
다이내믹 레인지가 광폭이라 할 만큼 넓지 않은 점은 역시 내부용적이라는 물리적 한계를 그대로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여린 음들을 묻히지 않고 잘 이끌어가는 점은 대견하다. F302로 들으면, 박수소리가 더 많이 들리고 보다 넓은 콘서트홀에 온 느낌이다. 공연장 내부는 확 트였고, 피아노는 마침내 그랜드피아노가 됐다. 그럼에도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해상도는 여전히 기대에 못미친다. 대신 다이내믹 레인지는 상대적으로 늘어났다.
F303에서는 필자가 좀더 앞 좌석에 앉아 피아노 협주곡을 듣는다는 인상이 강하다. 피아노는 좀더 비싸고 에이징이 잘 된 것으로 바꾼 것 같다. 무엇보다 앞의 두 모델에서 아쉬웠던 오케스트라 음의 해상도가 대폭 늘어난 점이 마음에 든다. 목관의 여린 음이 비로소 포근해졌다. 상급 모델로 갈수록 음의 입자감이 고와지는 점도 특징. 고역이 깨끗하고 청명하게 느껴질 만큼 다이내믹 레인지가 크게 확장된 점도 꼭 언급하고 싶다.
총평
지난해 말 파인오디오의 F1-10을 들으며 전성기 시절 탄노이 동축유닛의 음을 만끽했다. 사실, 지금도 자택에서 애지중지하며 듣는 스피커 중 하나가 탄노이가 1990년대 중반에 내놓았던 D-700 모델인데, 10인치 듀얼 콘센트릭과 10인치 우퍼가 빚어내는 그 은은하면서도 섬세한 재생음은 어디 내놓아도 크게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F1-10은 아이소플레어 동축유닛을 채택한 것만 봐도 탄노이 사운드의 전통을 새롭게 이으려는 기념비적 모델이다.
이에 비해 F300 시리즈는 파인오디오가 일반적인 유닛과 저역 컨트롤 방식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음을, 그것도 저렴한 가격표를 달고서도 들려줄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줬다. 세 모델을 맞비교해 가며 집중 시청한 필자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F303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지만, F301과 F302도 신생 제작사의 엔트리 모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음들을 들려줬다.
또한 각 모델마다 스펙과 사운드에서 엄격한 위계질서가 있는 점 역시 탄탄한 내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약하면, F301은 정위감, F302는 에너지감, F303은 SNR에서 상대적 우위를 보였다. 맞다. 창립멤버들의 ‘200년’ 업력은 이처럼 엔트리 모델에서도 그 존재감을 화려하게 내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