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 진공관 or 트랜지스터, 그 배부른 선택의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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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머릿속에 그 운율이 남아있는 옛날 이야기 대사가 하나 있다. 바로 ‘빨간 구슬 줄까, 파란 구슬 줄까’다. 어떤 맥락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구슬 선택에 따라 주인공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각 구슬 선택에 따라 결과값이 달라진다는 것은 어쩌면 요즘 유행하는 다중우주론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시청한 독일 빈센트(Vincent Audio)의 DAC-7도 이러한 선택권을 유저에게 던져준다. 아날로그 버퍼단에 진공관을 쓸 것인지, 트랜지스터를 쓸 것인지 선택은 전면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버튼이 들어가면 내장 진공관 12AU7을 쓰는 것이고, 버튼이 튀어나오면 내장 FET을 쓰는 것이다. 음질 변화? 뒤에서 자세히 쓰겠지만 누가 들어도 그 변화를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상당했다.
DAC이 이 선택권을 가졌다는 것이 왜 중요할까. 이는 제작사의 내공이 받쳐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진공관과 트랜지스터, 양쪽에 대한 지식과 이해, 제작노하우가 쌓이지 않으면 이런 제품을 내놓을 수가 없다. 구색만 갖추고 흉내만 낸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런 제품은 그냥 팬시 상품일 뿐이다. 그런 제품까지 리뷰할 시간은 없다.
빈센트와 진공관, 트랜지스터, 그리고 프랑크 블뢰바움
빈센트는 DAC과 CDP 뿐만 아니라 인티앰프, 프리앰프, 파워앰프, 포노스테이지, 케이블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트랜지스터는 물론 진공관, 그리고 이 둘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설계에도 적극적이다. 실제로 베스트셀러 CD-S6 MK나 인티앰프 SV-237 MK 모두 하이브리드 제품이었다.
그러면 빈센트나 TAC가 진공관을 적극 활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짐작은 증폭소자로서 진공관, 특히 3극관의 리니어리티(linearity)가 트랜지스터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 유명한 EP-IP 곡선을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또한 음질에 악영향을 주는 내부 커패시턴스도 트랜지스터가 진공관에 비해 높다.
프랑크 블뢰바움은 대놓고 진공관의 이점을 몇가지 요약했다. 하이브리드 인티앰프 SV-237과 관련한 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다.
필자의 짐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선 진공관은 작동 전압이 최소 150V에 이를 정도로 높다. 300B의 경우 플레이트에 최대 400V까지 걸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비해 플레이트를 빠져나가는 증폭신호의 전압은 많아야 10V이기 때문에 왜곡이 일어날 소지가 적다. ‘양동이 물에 잉크 물 퍼트린 격’ 이다.
이에 비해 트랜지스터는 작동 전압이 15V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접시 물에 잉크 물 퍼트린 격’ 이 되고 만다. 특히 게인을 확보해야 하는 전압증폭단에서는 이러한 ‘신호 오염’(왜곡)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독일 T+A 같은 제작사에서 음질 향상을 위해 트랜지스터 앰프의 전압증폭단에 200V 내외의 고전압을 흘려주고, 이 기술을 ‘HV’(High Voltage)라고 부르는 이유다.
‘속이 빈’ 증폭소자인 만큼 내부 커패시턴스가 낮은 점도 진공관의 장점. 진공관, 특히 3극관이나 3결 접속한 5극관의 소리가 맑고 투명하게 들리는 것은 커패시턴스 값이 낮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커패시턴스 값이 높으면 고음은 다 빠져나가고 만다. 프랑크 블뢰바움은 이를 ‘기생 커패시턴스에 따른 주파수 종속 왜곡’(Parasitic capacitances produce th frequency-dependent distortions in FETs)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왜 빈센트 DAC-7에서는 진공관과 FET 모두에게 기회를 준 것일까. 그리고 특히 인티앰프나 파워앰프의 경우 전압증폭단에는 진공관이나 진공관과 특성이 유사한 JFET을 쓰지만 출력단에는 바이폴라나 MOSFET을 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전압게인이 발생하지 않는 버퍼단이나 출력단(전류증폭)에서는 트랜지스터(전류증폭)가 대출력 생산과 빠른 스피드 등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DAC-7 본격 탐구
DAC-7은 빈센트에서 하이브리드(Hybrid) DAC이라고 명명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저가 진공관 버퍼단과 FET 버퍼단, 둘 중에서 골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브리드’라는 이름은 마찬가지이지만, 예를 들어 SV-237 MK 인티앰프가 전압증폭단에 진공관(12AX7, 6N1P), 전류증폭단에 바이폴라 트랜지스터를 써서 ‘하이브리드’라고 명명한 것과는 다른 맥락인 셈이다.
DAC-7은 기본적으로 일본 AKM AK4490 DAC칩을 써서 PCM은 최대 32비트/384kHz까지, DSD는 최대 DSD256까지 아날로그 신호로 컨버팅한다. 이 최대값은 물론 USB 입력의 경우이고 동축 입력 등의 경우에는 24비트/192kHz, DSD64로 제한된다. 디지털 입력단은 동축 2, 광 2, AES/EBU 1, USB-B타입 1을 갖췄고, 아날로그 출력단은 XLR, RCA 각 1조씩 마련했다. 6.3mm 헤드폰 출력잭도 갖췄다.
DAC-7은 또한 전원부에 정류관(6Z4)을 쓰고 아날로그 버퍼단을 밸런스로 설계했다. 6Z4는 필자가 2년 전에 리뷰했던 빈센트 CD-S7 DAC에도 투입됐었는데, 대형 토로이달 전원 트랜스포머를 빠져나온 교류 전기를 맥류 전기로 바꿔주는 ‘정류’(rectification) 역할을 한다. 이 정류단에 다이오드 대신 여러 정류 진공관을 쓰는 것은 빈센트의 오랜 전통이다.
아날로그 버퍼단에는 쌍3극관 12AU7을 채널당 1개씩 투입했다. 물론 전면 버튼을 통해 역시 밸런스 설계의 FET 버퍼단을 선택할 수도 있다. 12U7 2알만 갖고도 밸런스 설계가 가능한 것은 각 채널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신호를 12U7 한 알에 들어간 2개의 3극관이 각각 커버하기 때문. 버퍼단 출력은 트랜스포머가 아니라 커패시터 커플링 방식이다.
외관을 보면 전형적인 빈센트 스타일. 전면 알루미늄 패널 가운데에 둥근 창을 마련해놓고 그 바로 안쪽에 정류관 6Z4을 장착해놓았다. 마치 쇼윈도우를 보는 것 같다. 전면 패널에는 왼쪽부터 파워버튼, 입력 선택 버튼, 입력 표시 LED(광 2, 광 1, 동축 2, 동축 1, AES/EBU, USB), 진공관/FET 선택 버튼, 헤드폰 잭, 레벨(Level) 노브 순으로 마련됐다.
눈여겨 볼 대목은 헤드폰 인터페이스. 빈센트에 따르면 내장 헤드폰 앰프는 32옴부터 600옴 헤드폰을 모두 구동할 수 있으며, 헤드폰 잭 옆에 있는 레벨 노브로 헤드폰 앰프 볼륨을 조절할 수 있는 편의성도 갖췄다. 후면 구성에서는 램프(Lamp) 스위치가 눈길을 끈다. 이는 전면 진공관 옆에 붙어 은은한 오렌지색을 발산하는 작은 다이오드 밝기를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아예 꺼버릴 수도 있고, 1~3단으로 밝기를 조절할 수도 있다.
스펙을 보면 주파수응답특성은 20Hz~20kHz(-0.5dB), 왜율은 0.004% 이하, 신호대잡음비는 95dB 이상, 다이내믹 레인지는 100dB 이상을 보인다. 아날로그 출력전압은 2.5V다. 크기는 가로 430mm, 높이 95mm, 안길이 360mm 풀 사이즈이며 무게는 6.5kg을 보인다. 리모컨도 기본 제공된다.
시청
시청에는 네트워크 뮤직서버로 오렌더의 A30, 인티앰프로 오디아플라이트의 FKS10을 동원했다. A30과 DAC-7 연결은 USB케이블로 했다. 스피커는 포칼의 Diablo Utopia EVO. 음원은 오렌더 앱으로 주로 타이달 스트리밍 음원을 들었다.
먼저 진공관을 선택한 상태로 들었다. '내 이름은 미미'에서 들리는 소프라노 고음이 무엇보다 예쁜데, 이는 컨버팅된 아날로그 신호가 밸런스 설계의 12AU7을 빠져나온 덕이다. AKM 칩을 쓴 다른 DAC에 비해 해상도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이 소릿결의 감칠맛으로 충븐하다. 그러면서도 심지가 곧고 에너지감이 있는 것은 AKM 칩의 시그니처라 할 만하다. 전체적으로 맑고 투명한 소리. 이어 FET 버퍼단으로 바꾸면 단번에 기름칠을 한 듯 음의 표면이 매끄러워진다. 대신 무대 좌우퍽이 좁아졌으며 고음이 세게 나올 때 약간의 쇳소리 느낌이 있다. 다시 진공관으로 바꾸면 무대가 커지고 음이 풍성하고 편안해진다. 대신 음의 윤곽선이 선명하고 타이트한 맛은 줄어들었다.
진공관으로 들어보면 의외로 쨍쨍한 소리. 하지만 무대 가운데가 약간 빈 느낌이 있다. 바로 FET으로 바꾸면 스피드가 빠르고 탄력감도 늘어난다. 무대 가운데가 단단한 것이 앞서 진공관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록 장르처럼 밀도감이 팔요한 곡에서는 FET 선택이 옳으며, 이렇게 마치 튜브 롤링처럼 선택권을 유저에게 주는 점이 이번 DAC-7의 가장 큰 매력이아고 생각한다. 애니멀즈의 'House of the Rising Sun' 역시 매끈 새끈, FET이 좋았다. 진공관을 선택하면 에너지감이 늘어나지만 긴장감은 떨어지며 정리정돈이 100% 안되었다는 인상. 이에 비해 FET는 입자감과 무대감이 돋보인다. 이 선택 버튼을 곡에 따라 적극적으로 선택하시길 바란다.
이 곡은 진공관의 압도적인 승리. 음이 참으로 깨끗한 것이 청정수로 잘 헹군 빨래 같다. 이와 함께 음이 영롱한 것은 바이얼린의 배음이 잘 살아났기 때문이다. 악기가 덜 등장하는 봄 2악장은 이 DAC의 진가가 더욱 빛난다. 배경이 조용한 가운데 한 음 한 음이 정확히 뛰어다니는 덕이다. 온도감은 의외로 뉴트럴한 편. 진공관을 거친다고 해서 무조건 따뜻한 소리라고 여기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자 착각이다. AKM 칩을 핵심으로 한 컨버팅 해상력은 두말하면 잔소리. 뭉치거나 어깨 걸린 듯한 구석이 거의 없다. 봄 3악장에서는 음 끝이 아주 오래 가 크게 감탄했다.
FET으로 들었다. 피아노의 배음을 풀어내는 솜씨가 상급인데, 일반적인 델타 시그마 방식의 DAC과는 소릿결이 크게 다르다. 키스 자렛의 중얼거리는 소리는 '대박'이라고 메모했을 만큼 아주 잘 들리고, 건반의 터치음도 정확히 캐치해낸다. 여리고 무른 음이 아니라 심지가 곧고 알차며 힘이 넘치는 음이다. 진공관을 선택할 생각이 안 들었을 만큼 만족도가 높았다. 하지만 FET이든 진공관이든 DAC-7은 거침없이 내달리려는 질주 본능이 있기 때문에 앰프 매칭은 신경을 써야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값비싼 하이엔드 DAC에 비해서는 입자감이나 SN비에서 어쩔 수 없이 밀린다. 막판 혹시나 해서 진공관을 선택하니 음끝이 약간 뭉툭해졌다.
총평
이번에 빈센트 DAC-7을 시청하면서 DAC이란 결국 고수들의 2% 수싸움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DAC의 핵심 내지 본령, 레종 데트르는 양자화되어 자신에게 들어온 디지털 신호, 그 안에 담긴 세세한 정보량을 아날로그 신호로 복원하는 것. 하지만 DAC마다 소리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컨버팅 이후, 그러니까 I/V 변환회로라든가 아날로그 버퍼단 설계 때문이다. R2R DAC을 관통하는 밀도감과 편안함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저항성분인 I/V 변환회로를 거치지 않은 결과다.
DAC의 톤 컬러를 좌우하는 아날로그 버퍼단의 중요성은 이번 DAC-7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진공관만이 정답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트랜지스터만이 완벽한 것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 분명해졌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이 아날로그 버퍼단에 일종의 승부수를 던진 셈이고, 그 수싸움은 필자가 보기에 멋지게 승리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많이 듣는 애호가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S P E C I F I C A T I O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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